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폰 브라우히치 (문단 편집) ==== [[폴란드 침공]] ~ [[유고슬라비아 침공]]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2001-0706-501,_Warschau,_Walther_v._Brauchitsch,_Adolf_Hitler.jpg|width=500]] ▲ [[1939년]] [[바르샤바]]에서 [[아돌프 히틀러]](右)와 함께.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브라우히치는 육군 총사령관이란 직위의 특성상 일선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침공 작전의 수립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때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에서 잡힌 포로들을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폴란드 침공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하자 브라우히치와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패닉에 빠졌다. 당시 [[서유럽]]에서 최강의 육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를, 폴란드 침공이 끝난 지 1년도 안 된 데다가, 기갑 전력도 빈약했고 재정비가 크게 필요했던 독일군을 가지고 침공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 결국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암살'''해야겠다는 계획마저 세울 정도였다.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만나 프랑스 침공 날짜를 미뤄 줄 것을 간청하지만 당연히 히틀러는 격노했고 브라우히치를 휘하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맹비난했다. 히틀러에게 실컷 욕 쳐먹고 물러난 브라우히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 슬프게도 현재 독일군 보병의 사기는 1차 대전 때보다도 떨어져 있다. [[킬 군항의 반란|1917-1918년과 비슷한 불복종]]의 증상이 있어 왔다. > The aggressive spirit of the German infantry is sadly below the standard of the First World War ... [there has been] certain symptoms of insubordination similar to those of 1917–18." 그러나 웬일인지 히틀러가 침공 날짜를 뒤로 미루면서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 암살 작전을 일으키킬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다시 침공 작전 수립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940년]]에는 [[베저위붕 작전]]을 성공시켜 [[노르웨이]], [[덴마크]]를 정복했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 침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A집단군의 [[참모장]]으로 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기갑 부대를 주공 삼아 아르덴 숲을 돌파하자는 낫질 작전(Sichelschnitt)을 제출했다. 만슈타인의 상관이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동의하고 이것을 다시 육군 참모본부에 올렸으나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낫질 작전 자체가 실효성이 없고 지나치게 도박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만슈타인을 야전의 군단장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버려질 뻔한 낫질 작전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채택되었고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낫질 작전을 적극 수용해야 했다. 낫질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침공]]은 독일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침공 후 브라우히치는 [[원수(계급)|원수]]로 진급했다.[* 이때 [[일본군 육군]]의 장성인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만난 적이 있다.] 프랑스 침공 후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대영제국]]) 침공 계획을 수립했고[* 이때 영국 침공이 성공했다면 브라우히치는 영국의 총독으로 임명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브라우히치는 "영국놈들은 필패할 거임"이라 자신했지만 [[공군]] [[루프트바페]]는 [[영국 공군]]보다 전력이 약해 제공권을 확실히 휘어잡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결국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도 독일 공군의 패배로 끝나 버렸다. 체면이 구겨진 브라우히치는 [[1941년]]에 개시된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성공시키며 이미지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군이 워낙 약체여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701edbc89e1ce5c01355f6e4ef38f9a.jpg]] ▲ [[그리스]] [[아테네]]의 유적을 둘러보는 브라우히치(왼쪽에서 두 번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